이용자 서평


229. 복낙원 서평 - 작성자 : 박종현 (경영학부)  | 2017-10-20
"아버지의 참다운 모습이시며, 축복의 품에 앉으셨거나, 빛 중의 빛을 품으실 때나, 천상에서 멀리, 육체의 감실에 안치되어 있거나 인간의 형상으로 광야를 방황하시거나, 어떤 장소나, 복장, 상황, 동작에 관계없이 한결같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나타내시고 하나님다우신 힘으로, 아버지의 옥좌를 노린 낙원의 도둑에 대항하셨도다." "가장 높은 분의 아들이시여, 두 세계의 상속자여. 사탄의 진압자시여, 그대의 영광된 사업을 이제 착수하소서. 그리고 인류를 구하소서." 복낙원은 예수께서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나 유혹을 물리치는 내용을 아름답고 또 위엄있게 표현했다. 실낙원에서는 한 사람의 불순종으로 낙원을 잃었지만, 복낙원은 단 한 분의 확고하신 순종으로 낙원을 되찾게 된다.
228. 영원한 평화 서평 - 작성자 : 박종현 (경영학부)  | 2017-10-20
"영원한 평화는 공허한 이념이 아니라, 오히려 차츰차츰 해결되어, 그 목표에 끊임없이 더 가까이 다가서는 하나의 과제이다." 이번 중간고사 주제로 나온 임마누엘 칸트의 영구평화론을 공부하며, 원전인 '영원한 평화를 위하여(한 철학적 기획)'을 읽을 기회를 가졌다. 첫째로 경이로웠던 점은 칸트의 글은 지성 그 자체로 가득 차 있던 것이다. 그가 선택한 단어는 그의 사상을 분명히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는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절한 단어들만을 선택하여 '평화'가 무엇인지, '전쟁'이 무엇인지 설명했다. 간단하게 칸트의 영구평화론은 국가 간의 전쟁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해 '보편적인 국제연합'을 이루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평화'라는 정치적 최고선의 목표 아래, 영구평화론은 국제연맹과 국제연합의 기틀이 되었으며 3.1운동과 기미독립선언과도 그 정신이 맞닿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히려 모든 정치는 법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하며,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 정치는 지속적으로 빛날 단계에 이를 것을 희망할 수 있다."
227. 첫사랑 서평 - 작성자 : 박종현 (경영학부)  | 2017-10-20
"나는 그냥 그녀를 지나칠 뻔 했으나, 문득 정신을 차리고 헛기침 소리를 냈다. 그녀는 돌아다보았지만, 발길을 멈추지 않고 둥그런 밀짚모자에 늘어진 하늘빛 리본을 한 손으로 걷으며 나를 보고 생긋 웃어 보이더니, 다시 눈을 책으로 떨어뜨렸다. 나는 모자를 벗어 들고 잠시 그 자리에 주춤하고 섰다가 무거운 가슴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Que suis-je pour elle?'(나는 저 여자에게 무엇이 되나?) 첫사랑, 혹은 첫사랑이 아닐진대,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필시 나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너는 나에게 무엇인지, 나는 너에게 무엇인지, 그 무엇이 우리가 될 수 있을지. 체호프가 써내려간 이야기와는 다른 상황이더라도, 연모의 감정을 느끼고 있다면 누구나 또 다른 블라디미르가 되어 그의 감정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226. 롱펠로 시선 서평 - 작성자 : 박종현 (경영학부)  | 2017-10-20
유리창 너머로 비가 쏟아져 내리네. 날쌔고 드넓게, 진흙탕 물이 되어 홈통 아래로 강처럼 으르렁거리며 흘러내리네, 비여, 환영하노라, 비여! 열기와 먼지로 가득한 갈증 가운데 생명력 가득한 비가 내리는 역동적인 모습을 느낄 수 있었다.
225. 가문비 나무의 노래 서평 - 작성자 : 박종현 (경영학부)  | 2017-10-20
"신은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것도 마음대로 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것이 사랑입니다." 마틴 슐레스케는 단 세 문장으로 신의 창조 목적과 인간의 자유의지, 이 세계가 이루어지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는 C.S. 루이스의 저서 "순전한 기독교"에서도 동일한 방식으로 설명된다. 신이 존재한다면 인간의 삶은 왜 이리도 불공평하고 불의한 모습인지를 묻게 되지만, 모든 현상은 인간이 자유의지에 따라 행한 결과물이며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자유의지를 어떻게 쓰느냐이다. 우리는 스스로 천국의 자녀가 될 수도, 지옥의 일원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224. 톨스토이 단편선 서평 - 작성자 : 박종현 (경영학부)  | 2017-10-20
"신은 사람이 하나가 되어 살기를 원하시며, 그리하여 각각의 사람들에게 모두를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드러내신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비록 그들은 자신을 위한 걱정으로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들이 사랑에 의해서만 산다는 것을 이제 이해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신 안에 있고, 신은 그 사람 안에 있습니다. 신은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톨스토이 단편선의 첫 이야기인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의 핵심 주제이다. 인간을 향한 신의 목적은 사랑이며, 사람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지라도 모든 것이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톨스토이는 지극히 짧고 소소한 몇 장의 이야기만으로 온 인류와 우주, 그리고 그 창조자를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223. ‘정치적 아이러니’로서의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 작성자 : 윤정용 (영어영문학과)  | 2017-09-29
셰익스피어의 영국 역사극은 『존 왕』에서 『리처드 2세』,『헨리 4세』1, 2부, 『헨리 5세』, 『헨리 6세』1, 2, 3부, 『리처드 3세』, 『헨리 8세』에 이르는 총 열 편을 일컫는다. 시기적으로는 13세기 초엽부터 16세기 후반까지 약 4백 년의 영국 역사를 다루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그 자체로 하나로 거대한 ‘영국 역사의 서사시’인 동시에, 당대를 반영하는 ‘시사극’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의 마지막 사극 『헨리 8세』의 주인공 헨리 8세는 바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생모를 죽인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전체 열편의 개별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독자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전체 열편의 한 부분으로 귀속됨으로써 전체적인 맥락 속에서 더 풍부한 의미를 갖는다. 『존 왕』은 크게 사자심왕 리처드 1세 사후, 리처드 1세의 둘째 동생인 존 왕과 리처드 1세의 첫째 동생 아들인 아서 플랜태저넷 사이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합법 및 비합법 투쟁, 배신과 복수로 점철된 거래와 정략이 메인 플롯이다. 『존 왕』은 『리어 왕』에 비해 문학성은 떨어지지만, 분명 더 높은 사회구성체가 들어서 있고, 왕권과 귀족 사이 경제적 권력 투쟁에서 귀족의 승리의 결과인 ‘마그나 카르타’ ― 보이지 않거나 아주 희미하게 언급될 뿐이지만 ― 언급된다. (사실 마그나 카르타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중요해지는 것은 셰익스피어 사후다.) 결국 영국의 귀족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새로 등극한 존 왕의 아들 헨리 3세를 중심이 되어 프랑스 군을 물리치는 가운데 막이 내린다. 존 왕의 뒤를 이은 헨리 3세는 세 아들을 두었는데, 이들 모두 왕위에 오른다. 즉 에드워드 1세, 에드워드 2세, 에드워드 3세다. 에드워드 3세는 일곱 아들은 두게 되는데, 첫 아들 웨일즈 공 에드워드가 죽자 그의 아들, 즉 에드워드의 장손이 리처드 2세에 오른다. 『리처드 2세』는 학정으로 치닫던 리처드 2세의 치세 때 그가 에드워드의 넷째 아들인 랭커스터 공작 아들, 즉 그의 사촌 헨리 볼링브로크, 훗날의 헨리 4세에게 밀려나는 영국의 역사를 극화했다. 그렇기 때문에 『리처드 2세』,『헨리 4세 1부』, 『헨리 4세 2부』, 『헨리 5세』를 4부작으로 보아, ‘헨리 이야기’라는 뜻의 ‘헨리아드’(Henriad)라고 부르기도 한다. 『헨리 4세』는 어제의 동지, 오늘의 적과 치르는 전쟁을 다루는 잉글랜드 사극임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헨리 4세 1부』는 폴스태프라는 인물을 탄생시키는 전쟁, 더군다나 내전을 배경으로 탄생한 희극 걸작이기도 하다. 『헨리 4세』에서 주인공은 헨리 4세가 아니라 왕세자 해리와 폴스태프 및 그 패거리들이며, 전쟁, 더군다나 내전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산문과 운문의, 그리고 산문끼리 쟁패가 파란만장하다. 해리 왕세자는 폴스태프를 날카롭고 효과적으로 공략하지만, 그리고 내용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지만 폴스태프는 논리를 넘어서는 희극성의 존재 그 자체다. 비록 해리와, 즉 전쟁 소문이 아닌 전쟁 현실과 직접 마주치는 장면에서 폴스태프의 ‘희극성’은 일순 나약하여 해리한테 무참하게 깨지지만 그 나약함은 전쟁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럴까, 그런가? 그러나 전쟁에서, 죽음 앞에서 용기를 발휘하는 것이 정말 용기일까, 그건 무지가 아닐까? 그거야말로 위선 혹은 비겁 아닐까? 무엇보다, 평화는, 그리고 희극은 유지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등등. 『헨리 4세 2부』는 『헨리 4세 1부』에 비해 산문이 단조롭고 폴스타프가 ‘잉여 출연’인 듯한 느낌이 갈수록 강하며, 에필로그 직전 (헨리 5세에 오른) 해리 왕세자가 폴스태프에게 전하는 이별 통고는 그 자체로 적절하지만, 극 전체로 볼 때 너무 늦었고, 너무 늦었으므로 폴스태프의 대응은 희극적이기는커녕 단지 비루할 뿐이다. 그리고 곧 이어지는 에필로그가 다음 작품에서도 그가 등장할 것이라고 예고하지만, 다음 작품 『헨리 5세』에서 폴스태프는 실제로 등장하지 않고, 그의 죽음이 잠깐 언급될 뿐이다. 『헨리 4세 1부』에서는 퀴클리, 개즈힐을 비롯해 돌 티어시트, 스네어, 팽, 모울디, 워트, 휘블, 불카프 등 수 많은 인명이 언급되는데, 이는 이름이 굳어지고 족보가 생성되어가는 근대, 더군다나 참혹한 전쟁과 혹심한 희극 사이의 절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다. 『헨리 5세』는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전쟁 군주로 일컬어지는 헨리 5세의 프랑스 원정을 극화하고 있다. 캔터베리 대주교의 말에 고무되어 프랑스 왕관을 거머쥐기 위해 프랑스 원정을 떠나기 전 헨리 5세는 사우스햄튼에서 자신을 암살하려는 캠브리지 백작, 스크루프 경, 그리고 토머스 그레이 경의 음모를 발견, 이들을 처단하고 아르플뢰르를 점령, 칼레를 향하다가 아쟁쿠르 전투에서 프랑스 대군을 만나지만 크게 승리하며 트르와 조약으로 프랑스 왕의 딸 카뜨린트와 결혼하는데, 극 초반 피스톨과 결혼한 옛 퀴클리가 폴스타프의 죽음을 알리고 피스톨, 바돌프, 그리고 님이 원정대에 참가하지만 바돌프와 님은 약탈죄로 교수형에 처해지고, 피스톨은 웨일즈 지휘관 플루얼렌을 모욕했다가 그에게 흠씬 얻어맞고 부추 모양 채소 리크를 강제로 먹게 되며, 해리 왕은 플루얼렌을 잉글랜드 병사 윌리엄스와도 싸우게 만든다. 셰익스피어가 역사극에 천착했던 동기는 몇 가지로 살펴볼 수 있다. 첫 째, 그의 관객들을 포함해서 당시 튜더 시대 영국인들의 역사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기인한다. 엘리자베스 시대에는 이 경향을 반영해서 수많은 역사책이 발간되었다. 셰익스피어 사극 창작의 또 다른 동기를 극작가의 예술적 포부와 그 당시 극장 경영의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당시에 많은 극장이 생기다보니 공연 회수가 많아지고, 관객 수가 늘어났다. 그 만큼 희곡 작품의 수요가 급증했다. 작품 생산 속도가 빨라지고 연극 활동의 활성화로 발표되는 작품의 수가 늘어났다. 헨슬로의 기록은 당시 극작가들이 영국 역사 속에서 희곡 창작의 자료를 찾는 내용에 관해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이 극작가들이 자료를 얼마나 섭렵했는지에 대해서는 그 세기가 끝날 때쯤 되어서는 노르만 정복부터 튜더 시대에 이르는 왕조에서 희곡작품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통치자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는 사례를 보면 당시 극작가들의 사극 집필 의욕을 짐작할 수 있다. 역사극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16세기 후반 영국에서 국민의 자의식과 긍지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영국 문예 진흥의 활력을 제공하는 원천이 되었다. 국민들은 과거 역사를 알려고 했으며, 극작가는 그 욕구를 충족시켜 주었다. 셰익스피어가 사극을 쓰게 된 세 번째 동기는 엘리자베스 시대 국민들의 정치적 관심 때문이다. 희극이 형식이 사회적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고, 비극의 형식이 도덕적이며, 윤리적 인간에 대한 관심에서 생겨났다면, 역사극은 인간의 정치적 행위, 권력욕, 또는 권력의 획득 과정과 그 상실에 대한 인간의 반응을 다루는데 적합하다고 할 수 있다. 영국사에서 권력은 왕위를 의미했다. 그것은 또한 권력의 확대와 인간 능력의 한계 사이의 어떤 관계를 의미했다. 셰익스피어는 사극을 쓰는 데 있어서, 역사를 이용했다. 그의 이용 방법은 역사적 사실을 선택하고, 재구성하며, 축소하고, 확대하는, 그리고 때로는 추가하는 일이었다. 그의 목적은 정치의 본질적 문제에 접근해서 정치가 인간에 미치는 영향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일이었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사극에서 끊임없이 묻고 있다. ‘역사란 무엇인가’, ‘권력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질서는 어떻게 유지되어야 하는가’ 그는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직접적으로 제공하지 않는다. 다만 독자 또는 관객 스스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중세 봉건 사회로부터 장미 전쟁을 거쳐 봉건 사회가 와해되고 근대 초기 자본 축적기의 절대 왕조로 변모하는 잉글랜드 사회 격변의 과정을 비극과 희극을 모두 아우르는 전체적인 조망 속에서 서사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 격변의 과정을 통해서 셰익스피어는 궁극적인 신의 섭리의 작용이나 죄와 벌이라는 인과응보의 형태나 선의 궁극적인 승리를 담보하는 하나의 통일된 유형과 수렴의 과정으로 역사를 파악하기보다는, ‘국가의 통치자로서 왕은 어떠한 존재여야 하는가, 그리고 어떤 자질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가’를 제시한다. 즉, 이러한 치도의 문제를 군주를 중심으로 제기하는 데 셰익스피어의 궁극적인 관심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이 문제적 인물을 상정하고 그의 영혼과 운명이 파멸되는 과정을 다룬다면, 그의 역사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국가의 안녕과 같은 공적인 문제로 이야기를 확장해간다. 다시 말하면,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해당 개인의 파멸에서 끝나 한 편으로 완결되는 그의 비극과 달리, 미래를 향해 한 국가의 장래 운명을 향해 미완으로 열려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정치극에 다름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에서 그의 관심은 역사적 사건의 전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을 이야기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인물들의 성격에 정향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틸야드, 캠벨과 같은 역사주의 비평가들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연구하는 데 있어서 인간의 역사에 작용하는 신의 섭리를 확인하는 쪽에 주안점을 두어 온 게 사실이다. 예컨대, 틸야드에 따르면,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궁극적인 질서의 확립과 옹호를 위한 일종의 변론이다. 엘리자베스 시대 사람들에게는 질서가 규범이자 정상이며, 무질서는 예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틸야드의 단선주의적 역사관 또는 역사주의 환원론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이 보여주는 다양성을 간과함으로써 텍스트를 왜곡하고 있다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드러낸다. 틸야드의 한계를 어느 정도 수정하고 극복한 캠벨 역시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을 일련의 ‘신의 복수극’으로 파악하고 있다. 왕권에 대한 도전은 궁극적으로는 신의 징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틸야드와 캠벨과 같은 역사주의 비평가들은 그들의 질서 개념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거로서 『트로일러스와 크레시다』에서 질서와 위계를 강조하는 율리시즈의 대사를 삼는다. 율리시즈는 위계질서가 붕괴가 될 위기에 처한 시점에서 질서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통해 테르시테스와 같은 선동적이고 이질적인 목소리를 폭력을 동원해서 잠재우고 있다. 그러나 『존 왕』에서 로버트 팔콘브리지의 서자 필립의 대사와 율리시즈의 대사를 대조, 병치할 대 그들 각각의 발언은 역사적인 문맥 안에서 그 의미가 한결 명료해진다. 즉 필립 팔콘브리지에 따르면,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는 명예나 보편적인 복지에 대한 고려가 아니라 바로 ‘이기심’이다. 그는 정치 세계에서 적도 동지도 없고 약속이나 계약이 쉽게 파기되는 현실을 이기심, 혹은 편심 때문이라고 규정한다. 이것이 지배하는 세상을 그는 “미친 세상, 미치 왕들”의 세계라고 정의한다. 흥미롭게도 여기에서 셰익스피어는 ‘이기심’ 또는 ‘편심’을, ‘상품’을 의미하는 ‘commodity’로 쓰고 있는데, 모든 것을 변화시키는 편심, 혹은 상품이란 나중에 마르크스가 차여나 뚜쟁이와 같은 역할을 하는 화폐 상품의 의미를 선취하고 있는 바, 셰익스피어가 중세 봉건제에서 근대 초기의 자본주의 체제의 발아기에 처한 인간의 조건을 얼마나 제대로 묘사했는지 알 수 있다. 세상을 지배하는 원리가 이기심과 편익이라는 관점에서 헨리 5세의 프랑스 침략을 정당화하는 캔터베리 대주교의 주장 역시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애국심이 굳이 인종주의나 민족주의와 결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집단적 이기심으로 표출되는 역사적 사례를 『헨리 5세』는 예거한다. 셰익스피어 역사극이라는 거울은 캠벨이 강조하는 ‘거울로서의 역사’보다 폭이 넓고 투명하다. 셰익스피어는 『햄릿』에서 연극을 가리켜, “인간의 본성을 포함하는 자연에 거울을 비추는 것”이라고 말하며 연극이 곧 시대의 정수이자 연대기라고 찬양한 바 있다. 이 때 그가 말하는 시대의 거울인 연극은 결코 사물의 특정한 면만을 포착하여 보여주는 단면 거울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오목거울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볼록거울이 되기도 하며, 때로는 평면거울이 되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관찰자의 시선이 특정한 각도에 맞춰져야만 형상이 드러나는 요술거울이기도 하다. 즉 셰익스피어 역사극의 특징은 포괄적인 ‘다양성’에 있다.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에 나타난 다양성, 다시 말해서 이중성은 어떤 특정한 가치나 현상을 바라보는 인물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서 드러난다. 셰익스피어의 음악은 합주이고 대위법이다. 목소리의 대조와 병치가 차이를 만들어 내고, 이 차이가 사물의 단일성에 균열을 가져오는 동시에 다양성을 담보한다. 관점이 차이가 가치의 차이를 가져오듯,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에서는 시점의 차이가 선악의 가치를 전도시키고 영웅을 범인으로 변화시키기도 한다. 『헨리 6세』1부에서 드러나듯, 프랑스인들에게는 울던 아이도 울음을 그치게 할 정도로 무서운 존재인 탈봇은 잉글랜드 입장에서 보면 헤라클레스와 맞먹는 영웅이다. 그의 시체를 수습하기 위해 프랑스 진영으로 찾아온 잉글랜드의 윌리엄 루시에게 탈봇은 프랑스 왕국을 징벌하는 검은 복수의 여신과 같은 존재이다. 루시 경은 탈봇의 영웅적인 모습을 강조하기 위해 온갖 작위를 갖다 붙이는 서사시의 열거 기법을 동원하고 있다. 잉글랜드의 온갖 지방의 고유 명사가 탈봇에게 누적되어,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무게에 그가 압사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루시의 말을 듣고 있던 프랑스의 잔 다르크에 의해서 이러한 기법은 여지없이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죽은 탈봇은 파리 떼에 뜯기는 악취 풍기는 시체에 불과함이 강조될 뿐이다. 잔 다르크의 간명하고 조롱 섞인 언어는 루시가 구름 위로 올려놓은 탈봇을 여지없이 땅바닥으로 던져 버린다. 서사적 언어와 사실적인 언어의 대립은 탈봇을 보는 대조적인 시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생애의 대부분을 프랑스 전쟁으로 일관하다가 죽은 헨리 5세가 잉글랜드 사람들에게는 국토를 넓혀 준 애국적인 영웅이지만 프랑스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하기 짝이 없는 전쟁 기계에 불과하듯이, 셰익스피어에게 역사적 사실은 해석자의 주관적 해석에 의해서 신화화와 비신화화의 양극단을 오간다. 객관적인 역사는 극작의 과정에서 그 사실에 대한 해석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는다. 셰익스피어가 그의 역사극에서 구체화하고 있는 대조와 병치의 효과는 현실 정치에 있어서 선하지만 결단력이 없는 유약한 군주와, 악하지만 강력한 마키아벨리적인 군주의 대립과 투쟁으로 발전한다. 이것은 궁극적으로 어떠한 통치자가 이상적인 군주인가, 라는 치도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리처드 2세』에서 리처드 2세는 왕권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왕권신수설을 신봉하는 무능하지만 유약한 군주인 반면, 그의 사촌 헨리 볼링브루크는 백성들과 귀족들의 여론을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한 찬탈자이다. 마찬가지로 헨리 6세는 내란에 휩싸인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끼며 왕궁을 떠나 시골 숲 속에 은둔하여 세상과 절연하고 여생을 마감하고 싶어 하는 선한 군주이지만, 그의 유약함은 쉽게 요크 백작, 즉 리처드 3세의 찬탈 야심의 제물이 된다. 흔히 인간적인 미덕과 마키아벨리적인 현실감을 균형 있게 겸비한 이상적인 군주로 헨리 5세를 꼽지만, 그 역시 마키아벨리적인 힘의 정치가 인간적인 미덕과 병행될 수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셰익스피어는 역사극을 통해 역사적인 군왕들의 모습을 제시할 뿐 그 평가는 전적으로 독자나 관객의 몫으로 남겨 놓는다. 셰익스피어가 영국 역사극 열편을 하나의 전체로서 부분과 전체의 상호적인 의미를 제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과거의 역사를 조망할 수 있는 후대 사람이라는 점 덕분이다. 높은 산정을 조망하려면 그보다 높은 지점이 요구되듯이 셰익스피어는 과거의 역사적 사건들을 후대의 조망 탑에서 내려다 볼 수 있기 때문에, 각각의 사건에 전체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여기서 대조와 병치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전체적인 조망이 가능한 곳에서 비로소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공감과 거리 두기가 동시에 가능한 곳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견해나 태도의 충돌을 전제하기도 하고 동시에 야기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러니는 통일, 질서, 권위에 대한 환상을 해체한다. 아이러니가 참여와 방관이라는 이중적인 태도를 의미한다면, 셰익스피어의 역사에 대한 태도 역시 공감과 거리 두기라는 이상적인 방관자의 그것이며, 이는 그의 역사극을 보는 관객/독자의 이상적인 모습이기도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영국 역사극에서 대조와 병치 기법을 통해서 아이러니를 유발하고 동시에 아이러니를 통해서 내용과 형식면에서 대조와 병치 기법을 발전시키고 있다. 그의 아이러니가 독자나 관객에게 가져다주는 이점은 역사를 어느 하나의 단선적이고 통일된 관점에서가 아니라 다양성이라는 상호 모순적이고 충돌하는 견해를 전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망루를 제공하는 데 있다. 요컨대,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을 특징짓는 것은 다양성이며, 이 다양성을 담보하는 것이 바로 아이러니이다. 셰익스피어는 아이러니라는 장치를 통해 장미 전쟁을 둘러 싼 중세 영국의 정치 현실을 비추며, 이 현실을 자신의 당대 역사와 정치의 장에 겹쳐 놓는다. 셰익스피어의 정치극은 영국의 당대 역사에만 머물지 않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즉, 셰익스피어의 역사극은 과연 무엇이 바른 정치의 길인가, 라는 문제를 계속 제기하는 바, 문제 제기적인 일종의 정치극이며 문제극이다. 또한 바로 이 점은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보편성을 담보한다.
222. 민중의 '희망'과 '절망'을 노래하다 - 작성자 : 윤정용 (영어영문학과)  | 2017-09-29
숀 오케이시는 “평생을 하층 계급으로 살아왔고 가장 기초적인 교육 외에는 받지 못했던 인물로 인간의 권리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해 큰소리로 대변해준 인물”이다. 즉, 그의 관심은 언제나 가난하게 태어나 특권을 누리지 못한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그렇기에 일상의 소시민들의 삶에 천착하던 오케이시의 작품들은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를 살아가던 사람들의 신산한 삶을 생생히 묘파하고 있다. 민족적 영웅에 대한 천착, 영국의 지배 아래 민족성을 잃지 않으려던 민족주의적 성향, 정치적 변화와 현실에 대한 관심들, 힘없는 일반 소시민들을 좌초하게 만드는 사회현실과 그런 현실 속의 진정한 영웅들, 한국의 어머니와 같이 강인한 아일랜드의 여인들 등 오케이시의 작품에 나타나는 1920년대의 더블린의 모습들은 한국의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오케이시는 싱, 예이츠와 더불어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극작가로 꼽힌다. 싱이 아일랜드의 농촌을 작품 속에 담았다면 오케이시는 아일랜드의 도시를 대표하는 더블린을 작품의 주요 공간으로 삼았다. 또한 예이츠가 아일랜드의 전설과 신화를 중심으로 아일랜드를 구현하고 민족적 기상을 고취함을 극작의 목표로 삼았다면, 오케이시는 아일랜드의 신산한 역사를 온 몸으로 받아들이는 소시민들의 삶의 이야기를 형상화했다. 오케이시의 일명 더블린 3부작은 1923년부터 1926년까지 4년 동안 쓰였는데, 작품 속에서 담고 있는 시간적 배경은 『총잡이의 그림자』의 경우는 1920년의 게릴라전, 『주노와 공작』은 1922년의 내전, 『쟁기와 별』은 1916년의 부활절 봉기가 주 대상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창작 연대와 소재가 된 시간적 배경이 거의 일치되는 작품들이다. 따라서 더블린 3부작은 바로 당시의 아일랜드에서 벌어지던 실제 역사적 사건들을 극의 소재로 삼았던 매우 전형적인 작품들로서, 바로 오케이시의 자서전이자 아일랜드의 삶의 단면이며 아일랜드의 역사와 다름이 없다. 3부작의 공통적인 공간적 배경이 되는 더블린 빈민가의 공동주택은 ‘아일랜드의 축도’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공동주택에서 벌어지는 정치적․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민중들의 삶은 바로 아일랜드 전체가 경험하는 현실이다. 3부작 각각의 작품을 개별적으로 놓고 보아도 각 작품은 충분히 아일랜드의 삶의 단면을 보여주기에 충분하지만, 세 작품을 연결시켜 하나의 큰 작품으로 볼 때에도 전혀 상충됨 없이 아일랜드가 처해 있는 가난과 고통, 정치적 혼란을 총체적으로 보여준다. 세 작품 모두 영국의 식민지로서의 아일랜드의 상황 속에서 민족과 국가적 통일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끝없는 정치적 소요와 유혈 사태로 점철된 아일랜드의 비극적 역사의 한 시점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투쟁의 과정에서 양산된 민족 지도자들이 아일랜드를 가난과 억압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는 구세주로서 영웅적 존재로 숭배된다. 이 구세주에 대한 열망과 동경은 영웅의 흉내를 내는 거짓 영웅의 등장과 이들 가짜 영웅에 대한 더블린 사람들의 왜곡된 존경과 신뢰로 어긋나 투사된다. 이 과정에서 분출되는 갈등과 반목은 때로는 희극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비극적이기도 하다. 아일랜드 시민군의 깃발이 담고 있는 ‘쟁기와 별’은 이런 측면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상징이다. 아일랜드 사람들이 품고 있는 이상을 상징하는 ‘별’과 현실적인 노동을 상징하는 ‘쟁기’는 더블린의 3부작의 여러 측면에 비유적으로 작용 가능하다. 진정한 영웅이라는 별과 같은 존재 대신 거짓된 영웅들이 현실에서 들끓고, 진정한 실체보다는 그림자의 존재들이 현실에서는 실체를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민족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던져 놓는 진정한 투사들보다는 투사의 외양만 두르고 현실에서는 자신의 목숨 또는 이익에 집착해 실제 위기 상황이 벌어졌을 때는 오히려 도망가고 다른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투사의 그림자’나 ‘총잡이의 그림자’들에 해당되는 인물로 현실은 채워져 있다. 그들이 영웅이라고 믿은 영웅이 거짓 영웅이고, 그들의 이상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에도 더블린 공동주택의 민중들은 또 다른 영웅을 기다리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 희망과 기다림에 의지하며 힘겨운 현실을 버텨 나간다. 루쉰의 전언이 그들에게 위로가 될 수도 있다. “희망은 본래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상의 길과 같다. 사실은, 원래 지상에는 길이 없는데,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자 길이 된 것이다.” 이 희망과 기다림은 한편으로는 현실을 견디는 힘이 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거짓 구세주, 거짓 영웅들과 그 그림자들을 실제적 영웅적 존재로 착각하게 만들 수 있는 위험은 언제나 내포되어 있다.
221. 한 흑인 여인의 성장 소설 또는 사회 비판 소설 - 작성자 : 윤정용 (영어영문학과)  | 2017-09-29
예술가를 거칠게 분류하면 살아있을 때는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사후에는 아무도 모르는 예술가가 있고, 살아있을 때는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 불행했던 예술가가 있다. 아마도 가장 불행한 예술가는 살아있을 때도 죽어서도 그 누구도 기억해주지 않는 예술가일 것이다. 반면 가장 행복한 예술가는 살아있을 때 만큼이나 죽어서도 부와 명예를 이은 예술가였으리라. 하지만 그런 예술가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지는 않다. 모든 일이 다 그렇겠지만 살아생전 부와 명예를 동시에 누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그나마 다행인 사람들은 살아있을 때는 아무도 알아주지는 않았지만 사후 후대 예술가들에 의해 조명된 예술가일 것이다. 조라 닐 허스턴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허스턴은 앨라배마 주 노타설카에서 태어났고 세 살 때 침례교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 최초의 흑인 자치 도시 플로리다 주 이튼빌로 이주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나중에 이튼빌의 시장이 되었고 이튼빌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그녀의 작품들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영되어 나타났다. 허스턴이 학교를 졸업하고 뉴욕에 도착했을 때는 ‘할렘 르네상스’가 절정에 달했던 시기였다. 그녀는 랭스턴 휴즈와 월리스 서먼 등과 함께 『파이어』라는 문예 잡지를 발간하기도 했고 카리브 해와 미국 남부를 여행하면서 그곳의 문화적 관습을 연구하기도 했다. 1937년에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와 1939년에 『모세, 산의 사람』을 출간했지만 평단으로부터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동시대 흑인 남성 작가들은 허스턴이 흑인 방언을 사용함으로써 백인들의 취향에 부합해서 흑인 문화를 희화해했고 그녀의 작품이 정치적인 주제가 결여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들이 보기에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룬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같은 작품은 할렘 르네상스의 시대정신에 부합되지 않았다. 허스턴은 말년에 투병 생활을 하며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다가 1960년 플로리다의 한 복지원에서 심장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몇 십 년 동안 사람들의 기억에서 거의 잊혀졌던 허스턴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일어나게 된 것은 1970년대, 8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여러 대학에 흑인 문화 강좌가 개설되고, 흑인 문학을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분위기가 형성된 덕분이다. 그 노력의 결과물은 ‘조라 닐 허스턴 학회’의 설립이었다. 이 후 다양한 학제 연구를 가능케 할 주제들과 내용을 담고 있는 그녀의 대표작 『그들의 눈은 신을 보았다』는 차츰 미국 흑인 문학과 여성 문학에서 독보적인 작품으로 간주되었고 문학의 고전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주인공인 사십대 초반의 흑인 여성 재니 크로포드가 자신의 삶의 여정을 친구 피비에게 회상하며 들려주는 자서전적인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소설의 첫 부분은 재니의 어린 시절과 첫 번째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재니의 할머니 내니는 노예로 살면서 강제로 주인의 아이를 임신하고 딸인 리피를 낳았다. 리피 역시 학교 교사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재니를 임신한다. 리피는 고통을 못 이겨 재니를 남겨둔 채 가출한다. 내니는 리피에게 품었던 모든 희망을 재니에게 옮긴다. 재니가 열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이웃집 소년 조니 테일러와 키스하는 것을 본 내니는 재니가 남자에게 몸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며 노새 같은 삶을 살지 않도록 농장과 집을 소유한 로건 킬릭스에게 시집보내기로 한다. 재니가 이를 거부하자 내니는 재니에게 “흑인 남자는 짐을 집어 들긴 하지만 그걸 짊어지고 나르지는 않아. 그냥 자기 여자 식구들한테 짐을 넘긴단다. 내가 아는 한 흑인 여자들이 이 세상의 노새”라고 말하며 흑인 여성의 신산한 삶을 설명하며 재니가 평탄한 인생을 살기를 희구한다. 결국 재니는 할머니의 말에 따라 킬릭스와 결혼하지만, 그가 그녀를 존중하지 않자 그를 떠나 말 잘하는 조디 스탁스를 따라 이튼빌로 간다. 이튼빌에 도착한 스탁스는 근처의 땅을 사들이고 잡화점을 운영하면서 이튼빌의 시장이 된다. 스탁스는 야심만만한 인물이다. 그는 동료들에게 “우리 흑인들은 서로 너무 시기를 해. 바로 그 때문에 우리가 지금보다 발전을 못하는 거야. 우리는 백인들이 우리를 억누른다고 말들을 하지! 빌어먹을! 백인이 그럴 필요가 없다니까!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억누르고 있어”라고 말을 한다. 스탁스는 재니의 노동력을 착취하지는 않지만 그녀를 남에게 과시하기위한 일종의 ‘트로피 아내’로 간주한다. 그는 자신의 막강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재니의 완벽한 이미지를 원할 뿐, 재니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게 한다. 예컨대 그는 그녀를 자신의 소유물처럼 대하면서 그녀의 말뿐만 아니라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통제하고 실수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난한다. 재니는 처음에는 순종적으로 살지만 결국에는 그가 늙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권력자로서의 그의 모습에 대해 마을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환상을 깨버린다. 스탁스의 임종의 순간 재니는 그와 화해를 시도하지만 스탁스는 그런 재니를 비난하며 세상을 떠난다. 세 번째 부분은 재니와 티 케이크와의 사랑과 결혼이야기다. 스탁스가 세상을 떠난 뒤 재니는 끊임없이 구혼자들에게 시달린다. 재니는 그 와중에 티 케이크를 만나 사랑하게 된다. 처음에는 그의 의도를 의심하지만 둘은 상점을 팔고 잭슨빌로 가서 결혼식을 올린 뒤 습지인 에버글레이즈로 옮겨간다. 그곳에서 그들은 낮에는 콩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습지 사람들과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고 춤도 추고 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제니는 자신이 바라던 대로 사랑이 충만한 결혼 생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습지에 거대한 허리케인이 불어 닥치고 티 케이크는 물에 빠진 재니를 구하다가 미친 개에 물려서 광견병에 걸리게 된다. 재니의 헌신적인 간호에도 불구하고 티 케이크의 상태는 악화되고 결국은 광기에 사로잡혀 재니를 총으로 쏘려한다. 재니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티 케이크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살인죄로 기소된 재니는 법정에 서게 되고 티 케이크의 흑인 남자 친구들은 그녀에게 불리하게 증언한다. 오히려 그 지역의 백인 여성들이 재니를 변호하고 백인 배심원단은 재니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표면상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사랑이야기다. 재니는 몇 번의 결혼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사랑과 행복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그러나 이 소설은 단순히 진정한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한 여성이 자아를 확립하고 독립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순진한’ 소녀였던 재니는 여러 난관을 겪으면서 자신감 있고 자립적인 여성으로 변모해간다. 즉 이 작품은 재니의 일종의 ‘성장소설’로 평가할 수 있다. 재니가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은 내적으로 성장하고 자아를 확립해가는 과정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개인의 성장 소설에 그치지 않고 사회소설로 나아간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재니는 자신과 자아와 여성성, 목소리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난관과 장애에 부딪힌다. 재니가 처하게 되는 난관은 백인이 지배하는 미국의 사회구조에서 비롯되는 난관 뿐만 아니라, 흑인 사회 자체에 존재하는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에서 비롯되는 난관이기도 하다. 허스턴은 바로 이 지점에서 다른 작가들과 대별된다. 그녀는 흑인들은 겪는 불평등과 억압에 대해 소리 높여 분개하거나 동정을 구하지 않는다. 그저 무심할 정도로 담담하게 스쳐가듯 언급할 뿐이다. 그녀는 다른 할렘 르네상스 작가들과 달리 흑인들의 삶을 비참하고 억압당하고 가난한 것으로 묘사하면서 백인의 동정을 얻어내기 위해 징징거리지 않는다. 이런 태도 때문에 허스턴은 다른 흑인 작가들로부터 사랑 타령이나 하는 비정치적인 작가라는 비난과 오명을 받았다. 허스턴은 흑인들이 겪는 불평등과 억압 못지않게 흑인 여성들이 감내해야만 하는 가부장적 고통에 대해서도 말한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에서 재니는 모든 고통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친구 피비에게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한다. “떠들어대기만 하고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긴 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그런 말을 듣는 것은 달빛을 목구멍에 비추겠다고 입을 벌리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야. 어떤 곳을 알고 싶으면 그곳에 직접 가봐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잖아.” 이 구절은 재니가 앞으로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태도를 명징하게 보여준다. 재니에게는 슬픈 과거 역시 자신의 과거인 것이다. 재니는 지나간 과거는 과거대로 그대로 남겨두고 대신 다가올 미래를 보다 긍정적인 태도로 맞이해야 한다는 자신의 인생관을 역설한다. 결론적으로 재니는 결코 행복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결혼이었지만 이를 통해 한층 더 성숙해졌다. 즉 고통을 겪으면서 삶을 좀 더 깊고 넓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진정한 성장 소설의 한 범례를 보여준다. 또한 일방적으로 백인의 흑인 지배를 비판하는 길을 걷지 않아 비판을 받았지만, 대신 앨리스 워커, 토리 모리슨 등 이후의 작가들을 위한 발판을 마련해주었기에 그녀의 문학적 성과는 더욱 크다. 허스턴은 살아 있을 때는 작가로서 부와 명예를 누리지는 못했지만 사후에는 많은 작가와 독자들이 기억하고 있다. 사족으로 보태자면, 『그들의 눈은 신을 보고 있었다』는 오프라 윈프리가 제작하고 할 베리 주연으로 2005년에 영화화되었다. 시간적으로도 늦고, 그녀의 문학적 성과에 비해 부족하기는 하지만, 허스턴에게는 작은 감사 인사가 되었기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220. 손보미 소설읽기: ‘탈주’와 ‘가능성’의 글쓰기 - 작성자 : 윤정용 (영어영문학과)  | 2017-09-29
세상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작가들 역시 각기 다른 인생관과 세계관을 갖고 있기에 그들의 인생관과 세계관 역시 자연스럽게 작품에 투영된다. 어떤 작가는 소설쓰기를 세상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무언가의 창조 또는 발명으로 간주한다. 더러는 소설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몽하려한다. 좀 지나친 경우에는 계몽 또는 훈계를 넘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억지로 강요하려 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고 때로는 우스꽝스럽게 여겨진다. 반면 또 다른 작가들은 남을 계도하려는 그런 거창하고 원대한 욕망을 처음부터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는다. 대신 독자들이 보지 못하거나 보려 하지 않는 사실들을 조금 느슨한 방식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들의 태도가 느슨하다고 해서 그들이 전하려는 메시지 또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들은 세상에 절대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할 수 없다고 믿는다. 따라서 그들은 소설가는 그런 진리를 결코 보여줄 수 없다고 역설한다. 대신 세상을 잘 살기위해서는, 아니 잘 견디기 위해서는 스스로 ‘고민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문학의 유용성, 조금 논의를 좁혀서 소설의 효용성을 논하는 것이 무의미하고 불필요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한 번 짚고 가자. 근대 영미 소설의 발생 과정을 잠깐 살펴보면, 소설의 기능 내지 유용성은 오늘날의 그것과는 조금 달랐다. 바꿔 말하면 독자들이 소설을 소비하는 방식이 오늘날과는 달랐다. 오늘날 소설을 읽는 태도, 방식은 너무나 다양해 쉽게 일반화시킬 수는 없지만 진지하게 접근하면 대체로 소설읽기는 자기 경험 세계를 벗어나는 세상을 추체험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의 다름 아니다. 조금 가볍게 보자면 소설 읽기는 다른 오락거리와 비교했을 때 비교적 시간을 유용하게 보낼 수 있는 행위다. 그러나 18세기 중반 근대 소설이 태동했을 때 당시는 이성의 시대, 계몽의 시대였다. 따라서 소설은 마땅히 계몽의 도구이어야만 했고, 소설의 계몽적 기능은 19세기까지 후반까지도 유효했다. 당시 독자들은 중산층으로서 소설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진지했고 소설가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9세기 중반을 넘어서 특히 19세기 말에 이르러서 소설을 예술의 한 갈래로 파악하는 일군의 작가들이 등장했다. 그들은 통칭 ‘유미주의자’로 불렸고, 오스카 와일드와 월터 페이터 등이 여기에 속한다. 그들은 예술은 사회적 계몽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예술 자체로 자족성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소설이 전하는 ‘메시지’(내용)보다는 ‘스타일’(형식)에 천착했다. 소설에 대해 이전 세대에 가지고 있던 엄숙함과 진지함을 털어내고 거기에 새로운 스타일을 입혔다. 몇몇 독자들은 환호했지만 대부분의 독자들은 외면했다. 요컨대, 간헐적인 시도가 있기는 했지만 서양에서는 소설의 시기라 할 수 있는 빅토리아 시대 이후로 어찌되었든 간에 ‘인과관계’를 중요시하는 사실주의,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이 소설의 주류를 형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정을 한국 문학으로 돌려보자. 이광수나 최남선을 호출하지 않더라도 한국 소설 역시 계몽주의와 사실주의라는 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조금씩 계열의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소설(예술)은 우리의 삶을 모방하고 재현해야 한다”는 대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당연히 작가들의 브랜드라 할 수 있는 유니크한 ‘스타일’이 발현되기에는 문단의 토양이 척박했다. 그럼에도 문단에서는 끊임없이 ‘젊은 작가’들을 필요로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시대에나 젊은 작가들은 존재했고 계속해서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당대의 젊은 작가라고 명명할 때 가장 큰 기준은 작가의 생물학적인 ‘젊음’보다는 그/그녀가 얼마나 젊은 정신을 소유하고 있느냐, 시대정신을 대변하는가, 이다. 하지만 젊은 작가들 대부분은 생물학적으로 젊을 뿐 그들의 글에서 젊은 정신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 그래서 한 때 젊은 작가라고 불렸던 작가도 몇 년의 수련 또는 적응 과정을 거쳐 문단의 제도적 틀에 안착하게 되면 자의/타의로 젊은 정신은 노쇠해지고 기성세대의 소설 문법을 따라가게 되어 젊음은 흔적 없이 사라진다. 즉 안타깝게도 젊은 작가는 한 때의 칭호에 머물고 만다. 90년대를 기준점으로 삼아보자. 그 후 5년 또는 10년을 주기로 새로운 젊은 작가들이 등장했다.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쓰고 각 시대를 대표하는 젊은 작가를 열거하자면, 1990년대 초반에는 윤대녕과 신경숙, 1990년대 중반에는 은희경, 김영하, 2000년대 초반에는 김연수, 박민규, 2000년대 후반에는 김중혁, 김애란, 현재 2010년대 초반에는 황정은, 손보미, 한유주, 이장욱, 김미월 등을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황정은과 손보미의 활약은 괄목할 만하다. 이들은 『문학동네』 선정 젊은 작가상을 3회 연속으로 수상했다. 한 문학 계간지에서 수여하는 작가상이 젊은 작가 선정의 절대 기준이라고 단정할 수 없지만, 작가상 수상을 차치하더라도 황정은과 손보미는 다른 비슷한 시기에 문단에 등장한 작가들과 비교했을 때 차별되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지니고 있고 이를 계속 실험하고 있다. 작품성의 여부와 작품의 호오를 떠나 최근 손보미의 소설에 대해 많은 비평적 담론이 개진되고 있다. 한 마디로 그녀는 지금 가장 ‘핫’한 작가라 할 수 있다. 이 글에서는 주로 손보미의 소설에 나타난 그녀의 소설관, 글쓰기에 대해 살펴보려한다. 이 글에서 삼고 있는 손보미의 텍스트는 다음과 같다. 『그들에게 린디합을』(문학동네, 2013), 「산책」,『2014 제 5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문학동네, 2014). II 먼저 손보미의 소설을 읽으면 기시감이 든다. 즉 어디에선가 듣거나 본 적이 있는 듯한 이야기다. 마치 셰익스피어의 대부분의 극작품이 일차적 ‘원재료’(source)가 있는 것처럼 손보미의 소설 역시 생경하지 않다. 소설가를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가’라는 전통적 정의에 따르면 손보미를 훌륭한 소설가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어느 평자의 말을 조금 비틀어서 인용하면 그녀의 글쓰기는 “새로운 예술의 창작자보다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잊혀 지거나 잊으려 하는 것을 발견하려는 탐험가”에 가깝다. 이런 글쓰기 태도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소설관, 예술관에 상응한다. 또한 그녀의 소설의 문체는 많은 독자, 평가들의 지적대로 외국 소설, 특히 영미소설의 번역체에 가깝다. 단적인 예로 그녀의 소설에는 ‘나’ ‘그/그녀’와 같은 인칭대명사, ‘이(것)’ ‘저(것)’과 같은 지시대명사가 수시로 아니 과도하게 사용되어 결과적으로는 가독성을 해친다. 때때로 그녀의 소설은 문체를 떠나 한국어에 대한 훈련이 부족하다는 혹평이 뒤따르기도 한다. 서양 문학의 번역투에 가까운 그녀의 문체는 일차적으로 한국어 문장이 단단하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그녀 역시 이런 비판 또는 혹평을 간과했을 리 없다. 왜냐하면 많은 소설가들이 복잡하고 세밀한 감정의 결을 묘사하기 위해, 플롯을 구성하는 훈련 못지않게, 아니 그 보다도 더 부단히 모국어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고 상식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보미는 이런 부자연스러운 글쓰기 방식, 그녀의 입장에서 보자면 불리한 방식을 고수한다. 손보미는 의식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쓰면서 다른 작가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오히려 그 흔적을 그대로 남겨두고, 이를 자신만의 특징으로 삼는다. 그녀는 헤럴드 블룸이 말하는 “영향의 불안”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브랜드’로 만들었다. 그녀의 글쓰기 방식은 90년대 중반 당시의 많은 젊은 작가들이 시도해서 유행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의 ‘패스티쉬’와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 유행했던 패스티쉬가 의도하지 않은 ‘모방’, 즉 심하게 말하자면 ‘표절’에 가까운 반면에, 손보미의 다른 작가의 흔적을 남기는 것은 처음부터 상정한 ‘글쓰기’ 방식이라는 점에 있어 그녀의 글쓰기 방식은 패스티쉬와는 계통상 다르다. 사실주의, 자연주의 소설에서 작가는 전지전능한 존재자로 규정된다. 따라서 작가가 구축하는 서사는 완전무결하다. 작가는 때로는 가까이서, 때로는 멀리서 등장인물의 행동을 관찰하고 심리를 들여다본다. 심지어는 등장인물의 행동과 심리에 판단을 내리기도 한다. 서사를 구축하고 이를 관장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작가뿐이다. 그러나 손보미는 기본적으로 서사의 전지전능함을 믿지 않는다. 그녀는 서사를 “다만 이야기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려는 안간힘의 소산”으로 일축한다. 그런 의미에서 서사는 사건의 전말을 한 눈에 담아내는 파노라마가 아니라 단지 그 어떤 것이 있다는 것,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의 결이 존재한다는 증거일 뿐이다. 요컨대, 대부분의 소설가들이 완결된 서사를 통해 완벽한 건축물을 짓는다면, 손보미는 서사의 흠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는 종종 중요한 말을 일부러 지연시키거나 모호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그냥 침묵으로 비워둔다. 그녀는 서사의 불완전함을 통해 인간의 삶 역시 설명될 수 없고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예증한다. III 『그들에게 린디합을』은 표제작 「그들에게 린디합을」을 포함해 총 9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단편 소설들은 각기 독립적인 세계를 구축하고 있으면서도 연작처럼 유기적으로 매끄럽게 연결되어 있다. 즉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지만 비슷한 등장인물, 사건, 소품 등이 반복되고 변주되면서 전체 소설집에 긴장감을 형성한다. 「담요」가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하는 아버지의 이야기라면, 「애드벌룬」은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이 죽었다고 자책하는 아들의 이야기다. 「담요」에서 아버지는 죽은 아들을 잊지 못해 아들이 덮고 있던 담요를 늘 지니고 있는 반면, 「애드벌룬」에서 아들은 사고로 인해 담요를 분실한다. 이 외에도 이 소설집의 여러 단편에 등장하는 소품, 모티프, 사건들은 얼핏 보았을 때는 서로 연결점이 없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통일성과 긴장감을 형성한다. 『그들에게 린디합을』의 유기적인 구성을 통해 손보미의 소설관을 읽을 수 있다. 그녀의 작품은 얼핏 보았을 때는 예전의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처럼 의도적으로 해체하고 무질서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찬찬히 살펴보면 나름대로의 통일성과 규칙성을 읽을 수 있다. 어쩌면 그녀는 독자/평자들에게 자신의 소설을 좀 더 ‘꼼꼼히’ 읽어 달라고 강변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녀는 대놓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는 소설에 작은 모티프 하나 허투루 넘기지 않고 세밀하게 공들여 썼으면서도 겉으로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쉽게 쓴 것처럼 눙친다. 표제작 「그들에게 린디합을」은 그녀의 소설의 특징을 잘 담아내고 있다. 작품 전체가 모두 가짜로 구성되어 있다. 즉 이 작품에 등장하는 영화, 영화 잡지 기사, 인터뷰, 영화 평론 등 모든 게 허구인데 마치 진짜인 것처럼 뻔뻔하게(?) 이야기를 끌고 간다. 심지어는 이 작품을 끌어가는 주요 동력인 영화 <댄스, 댄스, 댄스>조차도 가짜다. 작품은 외형상 <댄스, 댄스, 댄스>를 연출한 길광용 감독의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진실 찾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손보미는 독자에게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이 사실인지, 허구인지 말해 주지 않는다. 심지어는 진실 찾기가 중요한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진실 자체가 모호하고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은 결말이 모호하기에 독자는 읽다가 또는 다 읽은 뒤 진실을 찾기 위해 다시 앞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진실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이 작품은 진실에 강박증이 있는 현대인에게 들려주는 ‘우화’로 기능한다. 사실주의 소설은 명징한 플롯을 본령으로 삼기에 결말은 분명하고 작가가 전달하려는 역시 선명하다. 그에 반해 손보미의 소설은 독자가 알아야 할 정보를 주지 않고, 더 나아가야 할 지점에서 멈추기 때문에 독자들은 당황스럽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아무 일도 없는 척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의 해체론 등의 거창한 이론을 언급하며 애써 현학적이고 세련되게 포장하지도 않는다. 정말 쿨하다. 「육인용 식탁」과 「침묵」의 주요 모티프는 외형상 부부간의 갈등과 균열이다. 「육인용 식탁」에는 세 쌍의 부르주아 부부가 등장한다. 두 쌍의 친구 부부를 초대한 가운데 주인공 ‘나’의 아내는 ‘나’와 친구 ‘윤의 아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 폭탄선언을 한다. 「침묵」에서 아내는 알코올 중독자인 남편이 술을 마시면 다른 여자들과 섹스를 하고 있다고 좌절하고 절망한다. 「육인용 식탁」에서 남편은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항변하지만 누구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침묵」에서도 남편은 결코 그런 일이 없다고 말하지만 역시 아내는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 두 작품에서 불륜의 실체는 명확하지 않다. 표면적으로 「육인용 식탁」과 「침묵」은 진실 찾기가 소설의 핵심이지만 작가는 충분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고 작품 속 진실 찾기 과정 역시 비과학적이고 납득이 가지 않는다. 작가는 어쩌면 처음부터 진실 찾기에 관심이 없는지 모른다. 그녀에게는 진실 찾기가 중요한 게 아니다. 아니면 진실이라는 것 자체에 의문을 던지고 있는지 모른다. 작가는 진실을 실체가 모호하기 때문에 진실을 찾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그래서 중요한 진실 찾기보다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사물이나 느닷없는 인물(「침묵」의 세일즈맨)을 끼워 넣어 균열된 부부에게 벌어진 사건의 징후와 맥락을 드러내려고 노력한다. 「폭우」에는 계급적으로 대립되는 두 쌍의 부부가 등장한다. 익숙한 사실주의 소설이라면 두 부부의 계급을 의도적으로 대칭시키거나, 계급간의 취향과 질적 차이를 부각한다. 그러나 「폭우」에서 작가는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격차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그들의 일상을 건조하게 서술한다. 두 부부는 교육 수준, 경제적 수준, 사회적 지위, 취향이나 삶의 패턴 등 모든 면에서 전혀 다르다. 따라서 두 부부가 서로 만날 확률은 거의 없다. 한 마디로 그들은 서로 다른 평행선을 긋고 있기 때문에 교차될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다. 전혀 만날 것 같지 않은 두 부부의 평행선은 부르주아 부부의 남자가 구청의 강좌에서 강의를 하고 노동 계급의 여성이 이 강좌를 수강하는 순간에 교차된다. 둘을 만나게 해주는 매개체는 남자가 강의하는 ‘재즈’ 강좌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는 계급을 나누는 것은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아니라 음악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두 남녀는 음악을 통해 계급적 연대 또는 동일화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둘 중 상대방에게 끌리거나 절실하게 원하지 않는다. 「폭우」에서 둘의 관계는 통속적인 불륜과 거리가 멀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남자의 아내는 둘의 관계를 의심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건이 부부 관계에 결정적인 균열을 초래하지도 않는다. 부르주아 부부 사이에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불안의 요소가 존재하고 이는 부부 관계에 균열을 가져올 수도 있다. 불안의 원인이 남편의 불륜일 수도 있고,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명확하지 않다. 작가는 이처럼 진실 찾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면서도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의 관계에 대해 부가 설명 없이 장면을 전환시키고 갑자기 소설을 끝내 버린다. 가장 최근작이라 할 수 있는「산책」에서도 손보미의 모호한 글쓰기는 일관된다. 이 작품은 표면상 늦은 밤 산책을 즐기는 아버지와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딸의 이야기다. 딸은 아버지가 산책을 핑계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고 확신하고, 아버지가 집을 비울 때마다 아버지 집 근처를 배회하며 아버지의 행적을 뒤쫓는다. 그리고 마침내 참았던 질문을 아버지에게 쏟아내며 진실 찾기를 시도한다. 그런데 딸의 질문에 대한 아버지의 대답의 와중에 불신의 화살은 궤적을 딸과 아버지 관계에서 그녀와 남편의 관계로 이동한다. 즉 딸의 심리의 표층에는 아버지의 산책의 진실의 희구가 있었지만, 심층에는 남편의 진심이 있었던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그녀는 아버지를 미행하고 추궁하면서 아버지의 산책의 진실을 원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일에 몰두하느라 남편의 행적을 알지 못했던 자신의 불안을 해소하려한 것이다. 손보미는 「폭우」와 「산책」을 통해 표층적으로는 평온하지만 심층적으로는 불안과 불신이 상존하는 부르주아 가정의 모습을 형상화해 가족 또는 가정의 토대의 허약함을 예거한다. IV 앞서 살펴보았듯이 손보미는 친밀한 관계 내부에 잠복해 있는 불안과 두려움의 요소를 포착하는 데에 특별히 탁월하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아주 사소하거나 관련이 없어 보이는 사실도 감정의 균열을 가져오고 종국에는 파국을 초래하거나 초래할 수 있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얼핏 보았을 때는 서사에서 관계가 없어 보이는 요소들도 모자이크의 한 조각처럼 나중에는 전체 큰 틀에서 짜져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가 된다. 손보미의 소설에는 중요한 키워드는 역시 ‘관계’와 ‘진실 찾기’다. 그렇지만 진실 찾기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아니 처음부터 실패가 예정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부부, 또는 연인이 서로 신뢰가 바탕이 된 굳건한 관계라고 여기는 것은 일종의 꿈 또는 허상일 수 있음을 아프게 재차 이야기한다. 그녀의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은 그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한다. 그 꿈에 편안히 안주하려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꿈에서 언젠가는 필연적으로 깨어나야만 한다.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의 진실을 찾으려하지만 이 역시 처음부터 불가능한 임무다. 작가는 상대방이 믿어주는 것과 스스로를 믿는 것 가운데 무엇이 더 중요한 것인지 질문한다. 부부란 형성되기 위해서는 잠에 빠지는 일과 깨어나 산책하는 일을 한 사람씩 교대로 맡을 때에만 유지되는 관계의 다름 아니다. 둘 다 잠들어 있으면 관계에 대한 성찰이 불가능할 것이고, 둘 다 깨어있으면 서로 격렬한 감정에 휩싸여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 추궁, 질책하게 될 것이다. 언제 아내가 가장 예뻐 보이냐고 물었을 때 “잠들어 있는 뒷모습”이라는 항간에 떠도는 농담은 그냥 농담처럼 들리지 않고 오늘날의 부부 관계를 환기시키고 있다. V 영국문학사에서 19세기 빅토리아 시대는 한 마디로 소설의 시대였다. 이 시기에는 수 많은 일급 소설가가 등장했고 문학사를 풍성하게 만들었다. 찰스 디킨스,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토머스 하디와 같은 남성 소설가뿐만 아니라 조금씩 시기적으로 차이를 두고 제인 오스틴, 브론테 자매, 조지 엘리엇과 같은 여류 소설가 역시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남녀 간의 관계, 즉 연애, 결혼, 사랑 등을 작품의 소재로 택했지만 이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금씩 달랐다. 간략하게 살펴보면, 먼저 오스틴의 소설은 표면상 낭만적인 연애, 결혼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스틴은 당대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를 반어적으로 비판한다. 그녀는 『오만과 편견』의 콜린스의 우스꽝스러운 성격화를 통해 당대의 ‘한정상속’ 제도의 불합리성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그녀는 이 외에도 여러 작품들을 통해 연애, 결혼에서 여성이 직면할 수 밖에 없는 경제적, 사회적 한계, 모순 등을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오스틴이 주로 제도를 비판했다면 샬롯 브론테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여성의 주체성, 자유의지에 방점을 둔다. 『제인에어』에서 제인은 남녀관계에서는 계급과 재산보다도 여성의 주체성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예컨대, 그녀는 결혼을 약속한 로체스터에게도 자신은 결코 “자동인형”이 되지 않겠다고 항변한다. 샬롯 브론테는 제인을 통해 여성도 남성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가 있는 존재임을 역설한다. 마지막으로 조지 엘리엇을 살펴보면, 조지 엘리엇은 시기적으로도 앞의 두 작가보다는 조금 늦다. 그녀의 소설은 빅토리아 시대 후반의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의 위선적인 실상을 담담하게(낭만적이거나 열정적이지 않고) 보여준다. 그녀는 남녀 간의 사랑, 결혼을 이상화하지 않는다. 때로는 그녀의 소설에서 남녀관계는 균열이 생기고 이는 종국으로 치닫게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손보미는 어디에 가까울까? 위의 세 보기에서 고르자면 그녀는 오스틴에 가장 가까울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의 본능과 탐욕을 억누르고(실상은 이것도 오해한 것으로 밝혀진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남자(「여자들의 세상」)를 신성한 사랑의 수호자로 치켜세우는 듯하지만, 그의 영웅적 면모가 강조되면 강조될수록 그의 내면은 한 없이 위축되고 쪼그라든다. 또한 아내의 대한 그의 사랑 역시 허울에 불과했음이 드러난다. 손보미는 일련의 소설을 통해 가부장제 이데올로기를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보다는 우회적으로 풍자한다. 근대 이후 인간은 보편주의, 엄숙주의의 영향아래 일상을 순화시켜왔다. 일상은 인과율에 따라 예상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고 예상 가능한 일상에 대한 적절한 매뉴얼을 체계화했다. “예술은 삶을 모방하고 재현해야 한다”는 대전제에 따라 문학은 당연히 ‘있을 법한 이야기’ ‘예상 가능한 이야기’를 소재로 택해야했다. 그러나 손보미의 소설은 여러모로 전통적인 소설과는 다르다. 일단 그녀의 소설은 인과관계에 따른 플롯보다는 우연성을 강조한다. 이는 우리의 일상 삶이 필연보다는 우연에 의존하고 있다는 그녀의 인생관을 반영한다. 그녀의 소설에서는 사건이 예상 가능한 대로 전개되기 보다는 예기치 않은 일들이 끊임없이 틈입한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계속 발생하기 때문에 적절하게 대처하기 어렵다. 아무리 훌륭한 매뉴얼을 준비한다하더라도 소용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하면 그냥 거기에 자연스럽게 맞춰야 한다. 그녀의 소설은 우리에게 이렇게 외치는 듯하다.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둬!” 손보미의 소설은 리얼리즘이라는 정해진 틀에서 탈주하고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모색한다.